2010년 3월 15일 월요일

만해 한용운 생가를 다녀와서

3월이면 봄기운이 완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서해안은 바닷물의 영향으로 이른 봄을 상상하며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초에 이번 여행을 준비했다.  기상청의 일기예보에는 일요일은 매우 화창하고 따뜻할 것이라고 말해 한줌의 의심도 없었다. 아 내일은 따뜻한 봄햇살을 받으며 봄기운이 돋는 서해의 바닷가를 걸을 수 있겠구나 했다.


2009년 즈음에 개통한 대전당진간고속도로를 지나 홍성을 지날 때였다. 도로에 세워진 갈색 안내표지판에는 김좌진장군과 한용운님의 생가가 멀지않음을 알리고 있었다.
‘내일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내어서 꼭 들러야겠다.’
‘흠. 홍성에 이런 인물들이 있었단 말이지.’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에 본 할매 할배섬(?)>


안면도자연휴양림에서 1박을 한 후 가까운 곳에 있는 꽃지해수욕장을 둘러보았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날씨는 전날보다 싸늘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렸다. 가볍게 기상청 험담을 좀 하고난 후 바삐 귀갓길에 올랐다.



‘아참! 만해 한용운님의 생가 터가 있었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즐거운 상상이 이어졌다.
‘일단 한용운님의 대표적인 시 님의 침묵을 가슴에서 울어나게 낭독을 하면, 아들 녀석이 무슨 내용이냐고 묻겠지? 그럼 시에 나오는 님이 무엇을 의미하고, 왜 이런 시를 썼고, 또 한용운님이 내가 살던 곤명의 다솔사에도 기거했었다고 말해줘야지.  그럼 으하하 나를 우러러 보겠지.’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용운님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네. 험. 쪽 팔리면 안 되는데.아내에게 좀 물어볼까? 님이 무엇을 뜻했지? 이런 젠장 시험만을
위한 공부를 했나 왜 생각이 안 나지?’


대전으로 돌아오는 큰길에서 제법 빠져 아담한 곳에 만해 한용운님의 생가 터에 도착했다. 일단 아들딸을 데리고 생가를 갔다. 여느 유명인의 생가와 너무나 똑같은 모습이었다.
부엌이 있는 초가집. 처마 밑에는 님의 침묵이 적혀있었다.
<만해 한용운 생가>

“아들 딸, 잘 들어. 이거 정말 좋은 시야”
“만해 한용운님은 아주 훌륭하신 분이야. 일본이 우리나라를 빼았아 갔을때 이를 되찾기 위해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헉 열심히 읽고 있는데 한자에 부딪쳤서 낭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이런 낭패가 있나. 아참 아이폰으로 검색을 해보면 되겠다’


아이폰으로 검색하는 잠간 동안에 이미 아들녀석은 나와 시와 한용운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방명록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아들 녀석은 “저도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한자(漢字)가 한 자도 없는 님의 침묵을 찾은 후 아이들에게 닥달을 했다.
“야! 잘 들어. 다시 읽어 줄께”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야! 집중하고 들어야지.”
“여기서 님은 조국을 말하는데 그런데 왜 님은 갔다고 말했느냐 하면 조국이 일본에 빼앗겨서 슬퍼다는 것이지. 응 알겠어?"
"야! 잘들어. 그런데 슬퍼만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야. 새 희망을 얘기하지. 새 희망의 정수박이 이 부분이 바로 독립 즉 광복을 노래한다는 거야. 야. 아빠가 노래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 노래라는 것은 니나노가 아니야. 희망을 이야기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거지. 누가 지었다고?  야야야. 한용운이라 말했잖아. 님이 뭐라고? 그래 조국이야.”


이런 나의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아이들에게 암기를 강요하는 능력없는 샌님 모습이었다.



이렇게 한용운 생가의 추땀에서 열불을 올리며 열강을 하는데,  한쌍의 중년의 부부는 생가를 둘러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이 웃고 지나가고, 아내는 저만치 사립문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딸도 방명록에 적겠다고 나섰다. 뭐라고 적나 가만히 보았다.
“저도 훌륭한 사람이 될께요.”
‘오호 여기서 저도의 ‘도’는 한용운 선생님이 나라를 사랑했듯이 자기‘도’ 나라를 사랑한다는 뜻이겠지?
흠 데려온 보람이 있구만’



광장으로 나오니 ‘나룻배와 행인’, ‘복종’ 등 여러 가지 시비가 세워져 있었으나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 지식 암기 위주의 견학은 시도할 수 었었다.
‘에궁 내 입만 아프지. 기념관에나 가자’



기념관에서 이런 저런 영상물도 보고 모형도 보았다. 아들 녀석은 홀로 그래픽에 빠져 몇 번인가를 보더니,
“아빠, 한용운선생님이 독립선언문 낭독할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래. 민족대표에는 주절주절”
조금 전 본 홀로 그래픽의 내용을 최대한 근접하게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기념관 옆 만해체험관에는 탁본을 경험할 수 있게 준비가 되어있었다.
<만해 한용운 흉상>

딸 아이는 “나는 스님할래”라며 먼저 선점을 했다.
나는 님의 침묵을 선택했다. 아들 녀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좋아 보였는지 자기가 궂이 님의 침묵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황수민. 이건 글자가 많고 섬세하게 해야해. 아빠가 할께”
“내가 잘 할 수 있어”
기어코 아들 녀석이 님의 침묵을 차지했다.


나는 마저절위(磨杵絶韋) “절구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었다는 뜻과 대나무 책의 가죽 끝이 끊어졌다는 고사로 쉬지말고 노력하라는 뜻” 탁본을 선택했다.
‘‘韋編三絶’과 유사한 뜻이구만.‘

딸아이와 나의 탁본은 그런대로 잘 만들어졌다. 아들 녀석의 탁본은 손에 검정잉크는 잔뜩 묻히고도 예상대로 제대로 된 완성품은 나오지 않았다.
관리자분은 워낙 원칙에 충실하셔서 1인 1매만 가능하다고 하시니 더 요구하자니 남사스럽고, 또 시간도 많이 흘렀고 해서 만해 한용운님의 생가터를 떠나 대전 집으로 향했다.



                                                                               2010.03.14

황외석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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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s://guideyou.tistory.com/entry/%EC%82%AC%EC%A7%84-%ED%81%AC%EA%B8%B0-%EC%82%AC%EC%A7%84-%EC%9D%B8%ED%99%94-%EC%82%AC%EC%9...